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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뜨는집 엄마의 기록노트 입니다.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아직도 접지 못한 엄마의 수줍은 흔적들입니다.
시민운동을 직업으로 살아가는 맞벌이 부부의 이야기, 어설픈 습작의 흔적,
스무살 언저리에 쓴 몇편의 시, 1년간 장애인복지신문에 연재한 보육사일기까지...
산그림자 4

국어는 종합문제만 풀고, 국사 문제집을 펼쳤다.
아예 답안지를 옆에 놓고 바로 대조해가며 훝어내려갔다.
대략 문제라도 눈에 익히자는 심산이었다.
어렴풋이라도 기억에 남아있는 거라도 되세길 수 있으면 되었다.
그런데 언듯 언듯 그의 얼굴이 자꾸 나타난다.
생각해보면 아무런 사이도 아니고 그럴 만한 상황도 아닌데...
어쩌면 그가 의미가 있는게 아니라 산 속이라는, 일상과 분리된 낯선 환경에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빠른 속도로 문제를 읽어가면서 내 속으로 뭔가가 스치듯이 흐르는 것이 느껴질때마다 조금 가슴이 아팠다.
무시할까 말까 망설여졌다.

거의 밤을 샌 것 같았다.
어스럼하게 창이 밝아져오고 있었다.
피로가 갑자기 몰려들어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따뜻했다.
잠이 들면서 또 조금 가슴이 아팠다.
무시하지 말고 흘러가는대로 맡겨버리자 하는 심정이 들면서 잠에 빠져들었다.

도대체 몇시나 되었을까?
아침 식사시간은 지났을거 같고, 점심시간은 아직 아닌것 같았다.
대충 물세수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시계를 보기 위해 기도원으로 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들이 있었다.
"밤 샜어요?"
그들 중 하나가 물었다.
"그냥..."
"안그래도 노래 연습해야 하는데 어쩌나 했어요."
아, 맞다. 오전에 연습을 하자고 했었지.
입구에 달려있는 시계 바늘은 10시를 조금 지나 있었다.
이곳에서 10시면 한낮인 샘이다.
"아침 안드셨죠? 배고파서 노래가 될까?"
"누구 식량 숨겨놓은 사람 좀 가져오지."
"근데 여기서 먹다가 원장한테 들키면 한소리 들을텐데..."
그들이 돌아가며 한마디씩 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습하죠."
내 말에 그들은 바로 노래를 부를 채비를 했다.
그들 중 하나가 기타로 반주를 했다.
수준급이었다.
기도원 안은 소리가 잘 울려서 화음이 더 잘 어우러졌다.
나는 그의 소리를 찾고 있었다.

한시간 가량 연습을 하고 기도원을 나왔다.
기도원 앞에서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오후에 한 번 더 연습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점심 시간까지는 한시간이 남았다.
숙소 앞까지 오자 갑자기 방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숙소 앞 작은 화단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동안 해바라기를 했다.
문득 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 무슨 터무니없는 짓인지...

교대에 떨어지고나서 지난 일년동안 나는 거의 세상과 단절한채 지냈다.
일부러 그런건 아니고 딱히 사람들을 만날 일이 없었다.
교회활동은 계속했지만, 교회는 내게 집보다 더 익숙한 곳일 뿐이었다.
일주일 중 일요일만 내가 살아있는 날이었고, 나머지 날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찻집도 술집도 영화관도 갈 일이 없었다.
아니 찻집은 교회 친구들과 몇번 갔던 것 같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막연하게 상상하던 낭만이니 뭐니 하는 그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조그만 사무실에서 전화받는 일을 하면서 집과 사무실만 오락가락 했다.
간혹 혼자 시내에 나가보기도 했지만 매번 사람멀미에 질리곤 했었다.
시내에서 집까지 한시간 가량 걸리는 거리를 나는 골똘하게 생각에 빠져서 걸어다녔었다.
그래서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었다.
대학에 입학한 내 친구 하나는 그런 나를 너무 답답해 했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전혀 일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산속에서 얼굴 안지 겨우 하루밖에 안된 남자를 궁금해하고 있다.
산을 내려가면 사라질 감정일까?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 그들 중에 그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기운이 빠졌다.
그러나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그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조금전까지 배가 몹시 고팠는데 식욕도 사라져버렸다.
그런 내가 못마땅하고 속상했다.
"어디 아픈거 아니에요?"
밥먹는 품새가 영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들 중 하나가 걱정을 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겨우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와서 잠을 잤다.
이불속으로 들어가자 말자 그냥 잠이 들어버렸다.

오후에 노래 연습을 할때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왜 갑자기 화가 나는지...
그들은 그가 지금 이 자리에 없다는 사실을 전혀 못느끼는 사람들처럼 자연스러웠다.
연습은 지루했다.
나는 그들이 그런 나를 눈치챌까봐 조마조마했다.

국사문제집을 계속 읽었다.
읽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시간이 너무 부족했기에 정신없이 훝어내려갔다.
사람은 다 적응하기 마련인가 보다.
저녁식사 시간이 되었는지 배가 고파왔다.
식당에 그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배신감이 느껴졌다.
혼자 실소를 했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혼자서 찾아다니는 꼴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내려졌다.

저녁 어스럼이 내려앉은 들녘을 바라보며 괜히 부끄러워서 혼자 웃었다.
무슨 어울리지 않는 사치를 부렸는지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새로운 숲길을 따라 산책을 하다가 갑자기 아궁이에 불을 떼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장작은 어디서 가져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하는지 걱정이었다.
허둥지둥 숙소 뒤편 아궁이로 갔다.
그런데 그가 불을 지피고 있었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확 불길이 얼굴로 치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그냥 달아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나는 꼼짝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집에 다녀왔어요."
그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말할때 쳐다보지 않아서 좋았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올까 하다가 그냥 왔어요."
나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렸어요?"
순간 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정말 이상한 남자다.
이제 겨우 두번째 대화를 나누면서 왜 이렇게 사람을 긴장시키는지...
그렇다고 말이 많은 사람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식사는..."
내 안에서 일고 있는 이 이상한 기류를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큰소리로 물었다.
"집에서 먹고 왔어요. 점심 겸 저녁으로..."
갑자기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왜 이 남자에게 이토록 집중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럴 때가 아니지 않는가.
또 그럴 건덕지도 없는데 말이다.
"슬퍼보였어요... 꼭 무어에 도망쳐온 사람 같고... 아까 말은 농담이었어요.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그가 또 읊조리듯이 이야기했다.
"집에 가면서 인사를 할려니까 좀 우습더라구요... 방문 앞에서 어쩔까 망설이다가 그냥 갔어요... 원래는 오늘 집에서 자고 내일 와야 하는데... 이게 걱정되더라구요."
그러면서 그가 아궁이 속을 한번 휘저었다.
그의 손놀림에 따라 불길이 확 춤을 추며 일어났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며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리곤 곧바로 가슴이 아파왔다.
뭔가 예리한 칼날이 닿이는 것처럼 가슴 한켠에 통증이 느껴졌다.

아궁이 속의 장작들이 불기를 다 내뿜고 사그라들때까지 우리는 아무말도 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가 아궁이 입구를 정리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내 가슴아픔의 정체가 뭔지 생각했다.
그는 내가 슬퍼보인다고 했는데 내 눈에 비치는 그도 역시 슬퍼보였다.
정면으로 볼 때 그의 얼굴은 그저 유순한 인상인데, 옆에서 보는 그의 곧은 얼굴선은 이상하게 외로워 보였다.
게다가 쳐다보지도 않고 혼자 읊조리듯이 이야기하는 그의 옆모습에서는 짙은 아픔이 베어나왔다.
그는 현관 입구까지 나를 데려다주고 돌아갔다.

뭔가 된통 당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여지껏 누군가에게 제대로 마음을 주어본 적이 없었다는 걸 되세기며, 그 댓가를 지금 치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하필 왜 지금이란 말인가.
이 중요한 시기에 꼭 그걸 치러내야 한단 말인가.
중학교때부터 꽤 오랫동안 혼자 좋아했던 머슴애가 떠올랐다.
얼굴이 윤곽이 뚜렷한게 꽤 그럴싸했고, 키도 왠만했고, 노래도 잘 했고, 약간 고상기도 있었다.
공부도 잘 했는데 그도 원하던 대학에 낙방하고 재수를 하고 있다.
중고등부 내내 같이 임원으로 활동했고, 노래도 같이 많이 불렀었다.
성가대 연습을 할 때 테너 파트인 그는 내 뒤 줄에 앉는 경우가 많아 합창을 하면서 그의 감미로운 음성을 즐길 수 있었다.
긴 시간동안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기도 했고, 몇시간씩 따로 중창 연습을 하기도 했고, 행사준비로 함께 밤을 새며 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나는 한번도 그에게 내 마음을 열어보인 적이 없었다.
그는 아마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저 이성에는 무관심한 순수하고 성실한 조그만 여자애로만 알고 있을 것이다.
어느날인가 낯선 여학생들이 우리 교회에 나타났고, 그게 바로 그 머슴애 때문이란 걸 알고나서 그에 대한 혼자만의 짝사랑도 끝이 났다.

이후로 사람이 쉬 좋아지지 않았다.
누구 누구가 사귄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들을때마다 유치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교회에 새로운 사람이 와도 별 궁금증도 없고 시들했다.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이 간혹 미팅을 하자고 조르기도 했지만 관심이 없었다.
우스울 것 같았다.
"너 임자 만나면 한번 보자."
그런 말을 하며 벼루는 친구도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을 안다면 진짜 고소해 할텐데...

 

 

이    름 :돌깡패
날    짜 :2005-09-15(13:29)
방    문 :78001
이 메 일 :nikol81@hanmail.net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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