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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산다고 다 가족은 아닙니다
1995년 10월, 시장통에 있는 허름한 한옥을 사글세로 얻어 한 아이와 같이 살림을 차렸다. 울도 담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허술한 집이라, 남자 후배 하나가 문지기를 자처하며 옆방에 들어 함께 살았고, 2년 후 그와 나는 결혼식을 치렀다.
결혼식 날, 두 손을 맞잡고 함께 입장하는 우리 부부 앞에는 초등학교 4학년 딸이 꽃을 뿌리며 앞서 걸었고, 두 돌이 갓 지난 딸아이는 내 품에 안겨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12년간 여덟 명의 아이를 위탁양육하고, 두 명의 아이를 입양하면서 우리집은 내가 결혼하기 전에는 ‘아동그룹홈’이었다가, 결혼한 후에는 ‘위탁가정’이었다가, 또 ‘입양가정’이 되었다.
우리 가정의 일상에서는 이러한 경계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음에도 이렇게 구분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뭘까? 그건 아마 우리 가족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비혈연 가족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은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산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에게는 함께 공유하는 추억이 있고, 세월을 함께하며 만들어가는 가족의 역사가 있습니다.”
언젠가 “가족이 뭐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가족을 한 마디로 정의하라는 요구를 받을 때면 참 막막하다. 대안가정 가족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요구되는 대답은 단순히 가족에 대한 정의가 아닐 것이기 때문에 더 그랬다. 만약 누군가 내게 지금 자녀가 몇이냐고 묻는다면, 지금은 셋이지만 얼마 전까진 넷이었고 한 달 후면 둘이 된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이 황당한 대답에 대한 부연설명을 할 것이고, 이어 친자녀는 없느냐는 질문을 다시 받게 될 것이다. 실제로 나는 이런 상황을 여러 번 만났다.
피보다 더 진한 무엇이 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핏줄은 절대 끊어질 수 없을뿐더러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가족을 이야기할 때면 핏줄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이 전제되어 있는 경우를 자주 본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이건 사실이다. 내 부모와 형제·자매를 생각해보면 이건 명백하다. 그런데 내 딸과 아들을 생각해보면 피보다 진한 그 무엇이 있음이 분명하다. 살아오며 만난 충격적이거나 큰 사건들 앞에서 비교적 침착함을 유지해온 내가 속수무책으로 당황해서 망연자실했던 순간들은 내 자식들과 관련된 때였다. 또 주사공포증으로 인해 마흔이 넘도록 건강검진 한 번 못 받은 내가 실신을 하면서도 두 차례나 피검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자식들 때문이었다.
내가 특별히 사랑이 풍부한 사람이어서 그렇다고 오해할지도 모르겠기에 부끄러운 고백을 해야겠다. 내가 보살펴왔던 모든 아이들에게 그렇게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건 입양한 딸과 아들에게만 가능했다. 그렇다면 법적으로 완전한 가족이 된 입양자녀와 일시적인 가족인 위탁자녀에 대해 내가 차별을 한 것일까? 내 무의식이 전혀 그런 작용을 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가족이 되어 함께하게 된 시기와 함께한 시간이 더 결정적이었던 같다.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딸은 생후 4개월에 위탁되었다가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입양했다. 또 올해 다섯 살인 아들은 생후 9개월에 입양했다. 두 아이 모두 갓난아기일 때 가족이 된 것이다. 딸아이는 정식으로 입양되기 전까지는 언제 친부모가 데려갈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자신의 생존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그 조그만 아기가 내게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무한한 사랑을 불러일으켰고, 내 삶에 있어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로 자리했다. 내가 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딸이 나를 엄마로 선택한 것이다.
백일이 되기 전 우연히 만난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말할 수 없이 평온한 미소를 띤 아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으면서도 당시에는 입양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한 번 안아주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나를 향해 웃고 있는 아기가 눈앞에 어른거리면서 밤잠을 설치게 되었고, 남편에게 우리 아들인 것 같다고 말하며 울었다. 그렇게 애를 태우면서도 생후 9개월이 되어서야 입양한 것은 시민운동을 하는 맞벌이 부부인 우리의 형편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안가정은 해피엔딩 동화가 아니다…사랑은 의지다!
반면 위탁양육한 아이들은 이미 어느 정도 자란 아이들이었다.
첫 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가족이 되었다. 청각장애인인 엄마는 자신의 삶을 꾸리는 것조차 힘들었고, 결국 아이를 공장 기숙사에 남겨둔 채 사라져버렸다. 아이는 글자도 읽지 못했고, 말하는 것도 다섯 살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게다가 너무 오랜 기간 방임되어서 일상의 규준이나 질서를 전혀 익히지 못했고, 도벽과 거짓말이 몸에 착 달라붙어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드물었다. 나는 이 아이를 사랑하지 못했다. 사랑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사랑은 의지다!”라고 스스로 세뇌하면서 배신감과 죄책감으로 허우적댔다. 2년 후 아이의 엄마가 갑자기 아이를 데려가면서 나는 해방되었지만, 1년 후 아이는 가출하여 영영 사라져버렸다.
1년 정도 휴식기를 가진 후 초등학교 6학년과 4학년 남매를 가족으로 맞이했다. 남매의 아버지가 재혼을 했는데 아이들로 인한 가정불화가 끊이지 않아 또 다시 이혼할 지경에 이르러 아이들끼리 하숙을 시키고 있었다. 친척들이 돌보기도 했으나 아이들 때문에 형제 간에 원수가 될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 아이들과 함께 살면서 나는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사랑은커녕 제발 아이들을 미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울며불며 기도했다. 남매가 협동하여 도둑질을 하는데 얼마나 치밀한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눈치조차 못 채고 있다가 교회 헌금을 통째로 들고 나오는 일이 있고 난 뒤에야 아이들의 실상을 알게 됐다.
전문가의 심리검사 결과 이 세 아이는 ‘품행장애’ 아동이었다. 옳고 그름에 대한 규준이 없고,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다.
딱히 심각한 문제가 없더라도 가족으로서의 소속감을 가지고 융화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이가 이미 익히고 적응한 세상이 있기 때문이다. 뭐라 표현하기도 애매하고 미묘한 문제들이 갈등을 유발하면서 자신의 바닥을 직면하게 된다. 이런 문제는 입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기저귀도 떼고 걸음마도 하는 서너 살 된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갓난아기를 양육하는 것보다 힘이 덜 들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육체적인 수고는 덜할지 몰라도 정서적인 충돌로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하기도 한다.
대안가정 가족으로 살아가면서 나의 미성숙한 인격과 옹졸한 성품에 많이 절망했다. 칭찬이나 찬사를 들을 때마다 부끄러움과 민망함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 되곤 한다.
대안가정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동화가 아니다. 일상을 함께함으로써 무너지고 부서지는 초라한 순간까지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할 뿐이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접한 가장 큰 어려움은 인식이나 편견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현상을 따라가지 못하는 법제도였다. 두 아이를 입양특례법에 따라 입양하면서 허위 출생신고 대신 합법적 절차인 양자입양 절차를 따랐다. 호적에 입양 사실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법과 원칙을 지키고자 10분이면 될 출생신고 대신 서너 달이 걸리는 양자입양을 한 것이다.
올해부터 친양자입양제도가 실시되면 당연히 적용되리라 기대했건만, 그 어디에서도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 가정법원에 문의하니 해당사항이 아니라며 법무사에게 상담을 받으라고 하고, 보건복지부에 질의했더니 관계 부처 간에 협의가 있어야 할 사항이란다. 악법도 법이니 지키겠다며 합법적인 양자입양 절차를 따른 입양가정에게 돌아오는 결과가 이러하다면 아예 허위 출생신고를 합법화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2002년 4월 27일, 대안가정운동본부 창립총회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대안가정’이란 용어를 선택했다. 국어사전에도 없는 단어다, 너무 광범위한 영역을 포함한다는 등의 이유로 용어의 선택을 두고 고민이 많았다. 이후 ‘대안가정’에 유독 민감하게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만났고, 심지어 ‘대안가정운동본부’라는 단체명을 바꾸라는 권유도 받았다.
사람들은 정의를 내리거나 규정하려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정의나 규정은 현상을 더욱 잘 표현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닐까? 정의를 내리는 것보다 실현되고 있는 현상을 아무런 선입견 없이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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